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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곡면 수원리 마을유래비

■ 나의 살던 고향 ◇─/마을유래비

by 황인홍 2017. 4. 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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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대 마을의 유래와 자랑


마을마다 유래와 자랑이 있겠으나 우리 마을은 자랑거리가 유달리 많다. 백두대간에서 남으로 흐르는 산맥이 소백으로 갈라져 삼도봉에서 주춤하면서 양팔을 벌리듯 장천 일대가 열리고 삼도봉을 원류로하여 북으로 흐르는 냇물은 장교천과 넓은 들을 이뤘다.
기이하갇고 웅장한 산세는 황학산 백화산으로 등줄기를 이루어 산자수명한 지세는 인걸을 낳는 원리에 따라 효자 열녀 충신 의병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 이전부터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마을을 흔히들 모른눼라고 부르는데 모현대가 원래  이름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현대-모른대로 변하게 되었다.
모현대란 어질고 훌륭한 성현들을 흠모한다는 뜻으로 송계서원에 배향된 여섯분 선비를 자랑으로 존경했으며, 그 영향으로 옛부터 선비가 많고 문장가가 많았다.
모현대라 이름하던 시절 매년 연중행사처럼 온 마을이 화재로 타 버리게 되었는데 마을 남쪽 덕고마을 입구에 화산이 있는 탓이라하여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소금 한 포와 명태 한 쾌를 묻고 물-마을 즉 수동이라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한다.
수동과 원촌, 덕고, 둔덕장터가 모여 수원리가 되었다.
모현대 구곡이 있으니 정주개 노송의 녹음, 장류의 푸른물결, 수세 좋은 넓은 들, 둔덕봉의 밝은 달, 청간정의 맑은 바람, 황학산의 흰구름, 옥녀봉의 붉은 노을, 매봉재 초동의 노랫소리, 갈대 강변의 고기잡이 등 그 자연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신라때 소라현 황계 황간현 땅응었으며 이조 태종때 충청도 땅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동군과 합하게 되었으며 우리 마을은 매하면 20개 마을의 중심지로 오곡면과 합병이 되어 매곡면이 될때까지 매하면 사무소가지39번지) 있었으며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431-4)에는 옛 학교인 서당이 있었다.
서울과 경상도를 잇는 상인과 과거길의 교통요지로 신어재를 넘어 괘방령으로 통하는 큰길이 동네앞을 지나감에 따라 물 건납에는 장터(310번지 일대)가 생기고 오가는 행객을 위한 여인숙과 객주집이 즐비했었다 한다.
따라서 농산물의 집산지로 경제의 중심지이자 상업의 요지였다가 지금은 임산 장터로 옮기게 되었다.
마을에는 삼훑걸 팔건달이란 조직이 있어 치안에도 일익을 했눼는 설이 있다.
무주와 물한에서 기원한 장교천은 사슬사철 물 마르는 일이 없으며 한해를 모르는 수세좋은 천혜의 고장으로 만들어 주었으며, 냇물에는 은린 옥척이 뛰놀고 냇가 양류에는 황금 꾀꼬리 넘나드니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라 하겠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마루에는 문필봉이 세개나 있어 문장가가 끊이지 않는다는 풍수설이 있으며 태어나는 자녀들 마다 글재주가 뛰어난데다 서당 덕분에 일찍부터 교육열이 높아 집집마다 대학을 안보내는 사람이 없으며 진학율이 타부락보다 월등하다.
이렇게 배운 사람이 많은 것은 마을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재목이 많아는 자랑이며 옛날부터 별나고 근실한 농사꾼이 많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지독하리 만큼 독농가로서 고소득을 위한 과학 영농에 머리를 써서 밤낫을 가리지 않는다.
마을 이름에 걸맞게 물은 천하제일이라 자랑할만하다.
정골 깊은 골짜기 땅속에서 내려오는 수돗물은 맑고 시원하고 아무리 써도 마르는 일이 없는 완전한 생수로서 동민들의 생명의 젖줄이요 남는 물은 관개수로 애용된다.
뒷산 매봉재와 마을끝의 청룡봉이 마을을 안고 정주개가 에워싸 마을을 이루는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춘 천혜의 삶터로 정해준 선인들의 지혜를 자랑하고 싶다.
현재와 같은 마을 형태가 이룩된 것은 약 4백년전이라고 청간기에는 기록되어 있으며 거창신씨가 맨 먼저 들어왔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이 불분명하고 순흥안씨가 1612년에 옥전리로 부터 이거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충의위 안국인 어모장군 안국신 형제가 터 잡으면서 마을 이름도 모현대라 고치고 마을을 중흥시키는 큰 업적을 남겼다.
거창신씨 순흥안씨 밀양박씨 충주박씨 고성남씨 경주이씨 벽진이씨 연일정씨 등 각 성씨가 모여 살아도 상부상조 화목단결하여 친척처럼 형제처럼 다정하게 다투지 않고 죄짓지 않고 그러면서도 서로 잘 사는 마을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60년대 5.16혁명후의 재건운동과 70년대의 새마을운동때는 남녀노소가 한덩어리가 되어 이고지고 밤낮없이 땀흘린 결과 마을 안길 담장 집 등 주거환경이 일신되고 소득이 늘기 시작하며 가장 앞선 모범부락으로 또 제1차로 자립부락으로 선정되어 군내에서의 모범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참관과 견학의 대상이 되었다.
아늑한 보금자리 슬기를 타고난 후손들 개척과 발전을 위해 전진하는 동민들, 상하를 공경하는 미풍양속 조상의 은혜를 알고 애향심에 차있으며, 발전을 위한 노력이 충만한 것은 좋은 터와 일찍 깨우쳐 주신 선인들의 슬기의 은덕이다.
우리 동민들은 조상의 높은 뜻을 받들어 전통을 더욱 빛내고 이해와 긍지를 가지며 범죄없는 살기좋은 마을로 무궁하게 발전하도록 다같이 힘을 합하자.


1994년 12월


영동군 매곡면 수동 동민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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