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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면 서송원리 마을 유래비

■ 나의 살던 고향 ◇─/마을유래비

by 황인홍 2017. 6. 1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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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송원리 마을 유래비


이곳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서송원리는 신라 때 소라현으로 그 읍은 광평리에 있었는데 경덕왕 때 황간으로 개명되면서 영동현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는 성주군(星州郡)의 전신인 경산부(京山府)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려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추풍령 일대가 숙연일공하자 임산리(林山里) 관기(官基)에 그 읍을 두었다.

조선 태종 때에는 충청도에 편입되면서 청산(靑山)과 합하여 황청현(黃靑縣)이 되어 그 읍을 신흥리(新興里)두었는데. 2년 뒤 다시 황간현(黃澗縣)으로 개명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진주싸움에 나갔던 현감 박몽열과 관속들이 환고로 폐읍이 되어 청산과 다시 합쳐졌다. 광해군 때 복현되어 충청도 황간현 서면(西面) 서송원리(徐松院里)가 된 본리(本里)는 1760년 서송원리(西松院里)의 '徐'자가 '西'자로 바뀌었고, 1895년에는 황간현이 황간군(黃澗郡)으로 개칭되었다.

충청북도의 유래는 1896년에 8도가 13도로 개편되면서 부터이고 1914년에 황간군이 영동군(永同郡)으로 합쳐지면서 서면(西面)이 없어지고 황간면(黃澗面)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리는 남쪽에는 대덕산(大德山), 동쪽에는 와룡산, 서쪽에는 응봉산이 있는데, 응봉산의 연맥은 동구(洞口)에 이르러 중암봉에서 멈춘 후 와룡산의 일맥인 북산평과 맞물려 수구장문을 이루며 성기산이 또 한번 북쪽을 막아주니 예로부터 합오행지촌(合五行之村)이라 하였다.

동구에 서 있는 괴목 일곱 그루의 내력은 알 수가 없으나 북산평의 송림은 동구에다 육림하라는 세전(世傳)에 따라 1955년에 동민이 합심하여 심은 것이다.

대덕산 법주골 오지에는 절 터가 있었고, 1943년 일제가 식량 증산책으로 상림골에 소류지를 만들었으나 1944년에 유실되어, 1952년에 복구하였으나 그 해 다시 붕괴되어 지금의 소류지는 1975년 동민들 스스로가 축조한 것이다.

세막골 입구와 점뒷골 입구에는 옹기터가 남아 있고 김독골 오지에는 주거지가 있었다.

대덕산 제단골의 중간지점에는 산제당이라하여 매년 음력 정월 초에는 마을의 평안과 복록을 기원하는 산제가 봉행되었는데 이 의식이 끝나면 마을 입구까지 내려와서 장승과 석탑을 향하여 재앙, 병마, 악괴를 쫓는 행사를 하였는데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이들을 우상숭배라하여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1972년에 모두 철거하였다.

마을에서 상림골쪽으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암대는 기우대라하여 한 해 때에는 그 곳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나 이 풍속도 산신제와 함께 사라졌다.  성기산 아래 원골에는 옛 역원이 있었고, 진고개 시누재고개 괘방령은 경상도로 연결되는 동네 앞 영남대로라 불렸으나 철도의 개통으로 폐로가 된 지 오래이다.

밀양손씨, 영일정씨, 여흥남씨, 밀양박씨, 안동장씨, 남양홍씨 등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고 있으며, 1909년에는 70호이었으나 지금은 41호 189명이 살고 있다. 농경지는 70정보로 포도와 사과가 주농이며, 생활 정도는 비교적 윤택하다.

355평에 살았던 세도가의 인척 한 분이 농민들에게 행패를 일삼았는데 영동의 가동리에서 이거한 영일인 정해당씨가 헌종 원년에 그 폐단을 제거하였다.

1909년 3월 14일 오후 7시경 의병 2명이 마을 위쪽에 살던 김자성의 집에 찾아와 식사를 요청하자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진 김자성이 이들을 체포하려하매 은신하고 있던 의병들이 이에 격분하여 마을을 습격, 방화하여 39호와 가재 전부가 소각되는 대화재사건이 있었다. 이 때 의병대장 박지관은 정감역 댁은 방화하지 말라하고 지휘하여 정유원의 아들의 집과 이에 옆집 등은 재난을 면했다.

원래 정유원은 평민을 구제하고 과객을 후대하고, 아들들은 의병에게 군자금을 공급하는 등 의병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의병대장 박지관은 혁혁한 무공을 세우다가 매곡면 내오곡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 끝에 전사하였다.

효종조의 주국운은 부모가 병들자 단지주형(斷指注血)로 치료케하여 정려되었고, 고종조의 영일인 정용택은 30리 밖 부모 묘소에 3년간 시묘하여 효자상을 받았다. 이 마을은 8.15해방 후의 격렬했던 좌우사상대립기나 6.25동란 중에도 단 한 사람의 희생자가 없었으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무난하게 고비를 넘긴 것은 고상하신 선대의 사표를 이어 받은 결과라 하겠다.

후인들이여 조상없이 어찌 후손이 나올 것이며 내력없이 어찌 마을이 생겼겠는가.

여기에 조상과 마을의 옛 일을 적어 두나니 나그네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옛 일을 되새기며 눈길을 들어 이 땅과 저 하늘을 우러러 지어라.


1991년 12월


                                     迎日后人  巨 林  鄭 泰 楨 謹撰

                                     晋州后人  湖 亭  河 葛 爲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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